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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보다 더한 친일파, 윤덕영은 누구인가

이완용보다 더한 친일파, 윤덕영은 누구인가

직답 요약: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은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의 친족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당시 조카뻘인 황후의 치마 속에서 국새를 강제로 빼앗아 넘긴 인물입니다.
공식 직함상 조약을 주도한 이완용과 달리, 윤덕영은 황실 인척이라는 사적 신뢰 관계를 악용해 매국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이완용보다 더한 친일파"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각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약에 서명한 '경술국적' 8인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훈1등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고, 이후 조선에서 손꼽히는 자산가가 되었습니다.
아래에서 옥새 강탈의 구체적 경위부터 사후 평가까지 시간 순으로 정리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옥새를 강탈한 순간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 창덕궁 흥복헌에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위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습니다.
당시 순정효황후는 조약 체결을 막기 위해 국새(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윤덕영이 직접 황후의 치마를 강제로 들춰 옥새를 빼앗았다는 일화가 여러 역사 기록과 후대 연구에서 전해지고 있어요.
친인척 관계에 있는 황후를 상대로 이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이 일화 때문에 그를 두고 "인륜을 저버렸다"는 평가가 나오는 거예요.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허용한 일본의 정치 행위에 신물이 난다." — 윤치호, 당시 일기 중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당대 지식인이었던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 친일 관료들의 행태에 대한 환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에요.
이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리한 「윤치호 일기」 관련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종을 무너뜨리기 위해 매달린 13시간
윤덕영의 행적은 옥새 사건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관료들이 고종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어요.
그러자 윤덕영이 직접 나서서 고종 앞에서 조약 체결을 압박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오후 2시부터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약 13시간에 걸쳐 물러서지 않고 결단을 촉구했다는 내용이에요.
같은 편이었던 일본 측 인사들조차 그의 집요함에 놀랐다는 이야기가 여러 자료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정작 '경술국적' 명단에는 없었던 이유
많은 분들이 헷갈려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윤덕영이 을사오적·경술국적 같은 '공식 매국노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경술국적은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에 참석해 조약 체결에 찬성하거나 묵인한 내각 대신 8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윤덕영은 내각 대신이 아니라 시종원경, 즉 황실 업무를 보좌하는 궁내부 관료였어요.
그래서 조약 '서명' 책임을 법적·공식적으로 묻기 어려운 자리에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역설적으로 그를 더 무겁게 비판하는 근거가 됩니다.
공식 책임이 없는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황후를 협박하고 고종을 밤새 압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이에요.
즉 법적 책임은 피해 갔지만 실질적 가담의 정도는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겁니다.

매국의 대가 – 작위와 재산
한일병합 이후 일본 정부는 조약 체결에 협조한 조선 귀족들에게 작위와 함께 이른바 '은사공채'를 지급했습니다.

윤덕영은 한일병합 협조의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 귀족령에 따라 작위 등급별로 차등 지급되던 금액 중 자작급에 해당하는 규모예요.
1910년대 조선의 순사 초임 월급이 10원 안팎이었다는 기록과 비교하면, 5만 원은 당시 순사 월급의 약 500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총 4,389명의 친일 행위자가 수록되어 있으며, 윤덕영은 그중에서도 정치 부문 핵심 인물로 분류됩니다.

이후 윤덕영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내며 각종 이권 사업과 토지 매입을 통해 재산을 계속 불려나갔습니다.
1930년대에는 조선에서 손꼽히는 자산가로 꼽혔다는 기록도 있어요.

이완용과 윤덕영, 무엇이 다를까요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공식적인 권한'을 이용했는지, '사적인 신뢰'를 이용했는지에 있습니다.
아래 표로 정리해봤습니다.



구분 이완용 윤덕영


공식 지위 내각총리대신 (을사오적·경술국적) 시종원경, 황후 인척
경술국적 포함 여부 포함 (조약 서명 당사자) 미포함 (내각 대신 아님)
핵심 행위 조약 체결을 정치적·법적으로 주도 황후를 협박해 옥새 강탈, 고종 13시간 압박
이용한 권력의 성격 공식 관직상의 권한 황실 인척이라는 사적 신뢰 관계
수여 작위 백작 자작
대중적 인지도 '친일파'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짐
비판의 핵심 국권 침탈의 법적·정치적 책임 인륜을 저버린 반인륜적 행위

이완용은 을사오적이자 경술국적으로, 조약 체결을 정치적·법적으로 주도한 책임이 명확한 인물입니다.
반면 윤덕영은 공식 직함상의 책임보다 다른 지점에서 비판을 받아요.
바로 황실 인척이라는 사적인 신뢰 관계를 이용해 매국 행위에 앞장섰다는 점입니다.

조카뻘인 황후를 직접 협박해 옥새를 빼앗은 행위
고종을 밤새 압박해 심리적으로 굴복시키려 한 행위
공식 책임자 명단에 없으면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행적

이런 이유로 역사 커뮤니티나 다큐멘터리에서는 종종 그를 "이완용보다 더한 인물"로 소개하곤 합니다.
다만 대중적 인지도나 상징성 면에서는 여전히 이완용이 '친일파'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어요.

벽수산장, 그러나 정작 살지 못한 저택
윤덕영은 서울 옥인동 일대에 '벽수산장'이라는 대저택을 지었습니다.
자신의 호였던 '벽수(碧樹)'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전해져요.
프랑스 귀족풍 건축양식을 본떠 오랜 기간에 걸쳐 지어진 저택이에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규모의 호화 건축물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정작 윤덕영 본인은 세간의 시선이 두려워 이 저택에 거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그렇게 큰 집을 짓고도 정작 그 안에 살지는 못했다니, 죄지은 자의 불안이 딱 그 모습 아니었을까요." — 옥인동 일대를 조사한 향토사 연구자의 후기

벽수산장은 이후 여러 용도로 쓰이다가 1966년 화재로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완전히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요.
현재 옥인동 일대에는 벽수산장 터를 알리는 표지판만 남아 있습니다.

윤덕영의 최후와 사후 평가
윤덕영은 1940년 사망할 때까지 별다른 처벌 없이 부와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조사와 연구를 통해 그의 행적이 재조명되었어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그의 행적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후손들이 소유했던 옥인동 일대 토지 일부는 이후 친일재산 환수 절차의 대상이 되기도 했어요.
2007년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도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합니다.
법적 책임은 비껴갔지만, 역사적 평가는 오히려 더 무겁게 그를 따라다니고 있는 셈입니다.

결론: "이완용은 명함도 못 내민다"는 말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공식 책임자 명단에도 없으면서 황실 인척이라는 사적 신뢰를 매국에 이용한 윤덕영의 행적을 근거로 한 평가이므로, 을사오적·경술국적의 '공적 책임' 관점에서는 이완용을, 인륜을 저버린 '사적 배신'과 실질적 가담의 관점에서는 윤덕영을 함께 기억하는 것이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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